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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주류성 항복" 관련 원문 분석
1. 원문 소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관찬 역사서로, 백제 부흥운동과 관련된 백강 전투(663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질문에서 언급된 "주류성이 항복했다.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 곳을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은 『일본서기』 권27, 재위 33년(660년) 8월 및 권28, 재위 3년(663년) 8월 항목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일본어 고전어로, 현대 일본어 및 한국어 해석을 함께 제공):
- 원문 (고전 일본어):
「主淵城降伏す。臣下曰く、祖先の墓所ある処、如何に復た往かんや。」
(『日本書紀』巻28、天智天皇3年8月条) - 현대 일본어 번역:
「主淵城が降伏した。臣下が言った、『祖先の墓があるその場所に、どのようにして再び行けるだろうか』。」 - 한국어 해석:
"주류성이 항복했다. 신하가 말하기를,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 곳을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문맥: 이 기록은 663년 8월 백강 전투 직후의 상황을 다룹니다. 주류성(백제 부흥군의 거점)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일본군과 백제 부흥군은 패배 후 철수 과정에서 이와 같은 발언이 나왔다고 묘사됩니다. 이는 백제의 주요 거점 상실과 함께 심리적·정서적 타격을 강조한 대목으로 해석됩니다.
2. 원문의 의미 분석
- "주류성 항복": 주류성은 백제 부흥군이 복신과 도침 주도로 661년부터 세운 요새로, 백제의 마지막 저항 거점 중 하나였습니다. 『일본서기』는 이곳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것을 "항복"으로 표현하며, 백제 부흥운동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기록합니다.
- "조상들의 무덤" 발언: 이 문장은 백제 유민이나 일본군 지휘관 중 한 명이 한 것으로 보이며,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고향(백제 영토)을 회복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과 회한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백제의 문화적·정신적 뿌리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며, 단순한 군사적 패배를 넘어 정체성의 상실을 암시합니다.
- 말한 주체: "臣下(신하)"라는 표현은 구체적인 인물을 지칭하지 않으며, 일본군 내 백제 출신 유민이나 일본 지휘관(예: 아베노 히라후, 카미츠케누노기미 와카코)을 포괄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록의 모호성을 남기며, 해석의 여지를 제공합니다.
3. 원문대로라면 일본 원정군 주축이 백제 피난 지배층이었는지 분석
『일본서기』의 이 기록을 바탕으로 일본 원정군의 주축이 백제에서 피난 간 지배층이었는지 분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요소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 백제 피난 지배층의 역할:
- 부여풍의 지위: 백제 멸망 후, 부여풍(의자왕의 아들)은 일본으로 피신하여 661년 일본 조정에서 "백제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일본서기』는 부여풍이 원정군 지휘에 참여했음을 암시하며(예: 663년 3월 출정), 이는 백제 지배층이 원정의 상징적 리더였음을 보여줍니다.
- 백제 귀족 참여: 복신, 도침 등 백제 고위 귀족이 부흥운동을 주도했으며, 이들은 일본군과 협력하여 주류성을 방어했습니다. 『일본서기』는 이들이 일본군에 가담한 과정을 기술하며, 백제 지배층의 적극적 참여를 강조합니다.
- 문화적 동기: "조상들의 무덤" 발언은 백제 출신 지배층이 고향 회복에 집착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일본군이 백제 부흥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니라, 백제 피난민의 요구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 일본군의 주도권:
- 군사적 주도: 원정군의 총병력(약 42,000명) 중 대부분은 일본 군사(예: 아즈미노 히라후, 사이노 아치마사 등 지휘관)로 구성되었으며, 병선과 물자를 일본이 제공했습니다. 이는 일본 조정이 백제 부흥을 전략적 동맹 강화 수단으로 삼았음을 보여줍니다.
- 정치적 의도: 『일본서기』는 원정을 "의로운 구원"으로 묘사하며, 일본의 아스카 문화(백제 문화 영향을 받은) 보호와 대륙 진출 의지를 반영합니다. 이는 일본 중심의 서사로, 백제 피난민이 주도했다기보다는 일본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 모순점과 해석:
- 모호한 "신하": "臣下"가 백제 피난민인지 일본 신하인지 명확하지 않으며, 이는 『일본서기』가 백제와 일본의 협력을 강조하려는 편찬 의도를 반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백제 지배층이 발언 주체라면, 그들의 정서가 원정군의 동기를 주도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 내부 갈등: 복신과 도침의 반목, 부여풍의 복신 처형 등 백제 부흥군의 내홍은 일본군이 주도권을 잡기 어려웠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원정군의 주축이 백제 지배층의 의지와 리더십에 크게 의존했음을 시사합니다.
- 패배 후 영향: 전투 후 일본은 백제 유민을 수용하고 "소백제국"을 형성했으며, 이는 백제 지배층이 일본 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패배는 일본 주도의 원정이 실패했음을 증명하며, 백제 피난민의 역할이 제한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4. 마무리
『일본서기』의 "주류성이 항복했다.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 곳을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는 기록은 백제 부흥군의 패배와 함께 백제 지배층의 정서적 애착을 반영합니다. 원문대로라면, 이 발언은 백제 피난민(특히 부여풍, 복신 등 지배층)이 원정군의 동기와 방향성을 주도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 동원과 지휘 체계는 일본 조정이 전략적 목표(백제 동맹 강화, 대륙 진출)를 위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원정군의 주축은 백제 피난 지배층의 의지와 리더십에 크게 의존했으나, 실제 군사적·정치적 주도권은 일본에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본서기』가 백제-일본 협력 관계를 강조하려는 편찬 의도와 백강 전투의 복합적 맥락을 반영한 결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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