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도(間島)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지역으로, 현재는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일대에 해당하는 두만강 북쪽 지역(북간도 또는 동간도)과 압록강 북쪽 지역(서간도)을 포괄합니다. 이 글에서는 간도의 역대 주인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시대순으로 정리하며, 역사적 맥락과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고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
간도는 고대부터 한민족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 고조선과 부여: 간도는 고조선(기원전 2333년경~기원전 108년)과 부여(기원전 2세기~494년)의 영향권에 속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 간도는 읍루와 옥저 같은 부족 국가가 존재했던 지역으로, 한민족의 초기 활동 무대였습니다.
- 고구려 (기원전 37년~668년): 고구려는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를 영토로 삼아 북옥저와 백산말갈을 복속시켰습니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서 농경과 수렵을 기반으로 한 경제 활동을 펼쳤으며, 백두산 일대까지 실효적 지배를 행사했습니다.
- 발해 (698년~926년):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간도를 포함한 만주 동남부를 영토로 삼았습니다. 발해는 농업과 무역 중심지로 간도를 활용하며 한민족의 문화를 유지했습니다.
- 우리와의 관계: 이 시기 간도는 한민족의 고유 영토로, 고구려와 발해를 통해 한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이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한민족의 정신적·지리적 중심지로 여겨졌습니다.
2. 중세: 여진족과 고려, 조선 초기
발해 멸망 이후 간도는 유목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한민족의 직접적 영향권에서 벗어났습니다.
- 요나라와 여진족 (10세기~17세기): 발해 멸망 후 간도는 거란족(요나라, 916년~1125년)과 여진족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여진족은 농경보다 유목과 수렵에 종사했기 때문에 간도는 오랫동안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 고려 (918년~1392년): 고려는 간도 일대에서 여진족과 충돌하며 북방 영토를 확장하려 했습니다. 1107년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9성을 설치했으나, 여진족과의 강화로 이 지역을 반환했습니다.
- 조선 초기 (1392년~17세기): 조선은 세종대왕 시기(1418년~1450년) 4군 6진을 설치하며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의 여진족을 귀화시키거나 몰아냈으나, 두만강 북쪽 간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지는 않았습니다.
- 우리와의 관계: 이 시기 간도는 한민족의 직접적 지배는 없었으나, 고려와 조선이 북방 영토 확장을 시도하며 간도와의 간접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여진족과의 교역과 충돌을 통해 간도는 한민족의 관심 지역으로 남았습니다.
3. 조선 후기: 청나라의 봉금과 조선인의 이주
17세기 이후 간도는 청나라의 봉금 정책으로 인해 무인지대가 되었으나, 조선인의 이주로 다시 한민족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 청나라 (1644년~1912년):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며 간도를 포함한 만주를 장악했습니다. 청나라는 간도를 자신들의 발상지로 여겨 봉금(封禁) 지역으로 지정, 이주와 개간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 조선인의 이주 (19세기 중반~): 19세기 초부터 조선의 세도정치와 수탈, 1869~1870년 함경도의 대흉년(기사대흉년, 경오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조선 농민이 봉금령을 피해 두만강 북쪽 간도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비옥한 간도를 개간하며 농경지를 만들었고, 1860년대에는 간도 내 한인 인구가 약 7만 7천 명에 달했습니다.
- 백두산정계비 (1712년):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습니다. 비문에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삼는다"고 적혔으나, 토문강의 위치를 두고 해석이 달랐습니다. 조선은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청은 두만강으로 보아 간도의 귀속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 우리와의 관계: 이 시기 간도는 조선인의 주요 이주지로, 한민족의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간도를 자국 영토로 주장하며 실효적 지배를 시도했으나,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으로 명확한 경계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4.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간도 분쟁과 상실
19세기 말부터 간도는 국제적 분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결국 일제에 의해 청나라에 넘겨졌습니다.
- 대한제국 (1897년~1910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1902년 이범윤을 북간도시찰원으로 파견, 한인 주민의 호적을 조사하고 관할권을 행사했습니다.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해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려 했으나, 청나라와의 충돌로 1904년 소환되었습니다.
-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1909년):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처음에는 간도를 대한제국 영토로 인정하며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1909년 간도협약을 통해 일본은 남만주 철도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겼습니다. 이 협약은 대한제국의 동의 없이 체결된 불법적 조치였습니다.
- 항일 운동의 거점: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간도는 한인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습니다. 1910년대부터 신흥무관학교, 간도국민회 같은 단체가 설립되었고,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 우리와의 관계: 간도는 대한제국의 영토로 주장되었으나, 일본의 간도협약으로 상실되었습니다. 그러나 한인 이주민과 독립운동을 통해 간도는 한민족의 정체성과 항일 정신이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5. 현대: 중국의 통치와 조선족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간도는 중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현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편제되어 있습니다.
- 중화인민공화국 (1949년~현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간도는 중국 영토로 확정되었습니다. 1962년 조중변계조약을 통해 북한과 중국은 백두산 천지를 분할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했습니다. 현재 간도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75~80%가 한인(조선족)으로 구성된 지역입니다.
- 조선족의 역할: 조선족은 간도에서 한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이 한국으로 이주해 경제적·문화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우리와의 관계: 간도는 법적으로 중국 영토이지만, 역사적·문화적으로 한민족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조선족을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간도 영유권 회복을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남북통일과 국제적 협상이 선행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종합 분석
간도는 고대부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로 한민족의 고유 영역이었으나, 중세 이후 여진족과 청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한민족의 직접적 영향권에서 벗어났습니다. 19세기 조선인의 대규모 이주로 다시 한민족의 삶의 터전이 되었으나, 1909년 간도협약으로 일본에 의해 청나라에 넘겨졌고, 현재는 중국 영토로 편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역사적, 문화적, 민족적 연속성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간도는 한민족의 고토로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현재는 조선족을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도 영유권 회복은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 남북통일이라는 현실적 과제와 얽혀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간도는 단순한 영토를 넘어 한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합니다.